쿠마모토, 성과 정원 그리고 문학의 도시 – 구마모토성에서 나쓰메 소세키 유적까지
규슈 중앙에 위치한 쿠마모토는 일본에서도 유난히 ‘단단한 도시’로 불린다. 웅장한 성곽과 무사 문화의 흔적, 절제된 정원, 그리고 근대 문학의 숨결이 켜켜이 쌓여 있다. 이 도시는 화려함으로 기억되기보다, 오래 곱씹을수록 깊이가 느껴진다. 쿠마모토 여행은 구경을 넘어, 한 도시가 품어온 시간과 정신을 음미하는 경험이다.
구마모토성 – 규슈를 지배한 검은 성의 위엄
구마모토성은 일본 3대 명성 중 하나로 꼽히는 대표적인 성곽이다. 검은 외벽과 웅장한 천수각은 멀리서도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쿠마모토가 무사의 도시였음을 단번에 보여준다. 이 성은 에도 시대 명장 가토 기요마사가 축성한 것으로, 방어를 극대화한 구조 덕분에 ‘난공불락의 성’이라 불렸다.
2016년 구마모토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이후, 현재까지도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무너진 돌담과 보수 중인 성곽은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노력을 동시에 보여준다. 구마모토성은 완성된 유적이 아니라, 지금도 역사가 이어지고 있는 살아 있는 공간이다.
스이젠지 조주엔 – 걷는 순간 완성되는 일본 정원
구마모토성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면 전혀 다른 분위기의 공간이 펼쳐진다. 스이젠지 조주엔은 에도 시대에 조성된 회유식 일본 정원으로, 일본 정원의 미학이 응축된 장소다. 연못과 잔디 언덕, 소나무와 산책로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한 바퀴를 도는 동안 풍경이 계속 변한다.
이 정원은 일본의 명승지를 축소해 표현한 공간으로, 특히 후지산과 도카이도를 상징적으로 담아냈다. 화려한 장식이나 인위적인 연출 없이, 걷는 사람의 속도에 맞춰 풍경이 완성된다. 스이젠지 조주엔은 쿠마모토가 강인함뿐 아니라 여백과 자연을 존중해온 도시임을 보여준다.
호소카와 교부테이 – 무사의 삶을 들여다보는 공간
스이젠지 인근에 위치한 호소카와 교부테이는 쿠마모토 번을 다스리던 호소카와 가문의 저택이다. 성처럼 위압적이지 않고, 낮은 처마와 단정한 구조가 인상적인 이곳은 무사의 일상과 생활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정원과 실내가 자연스럽게 연결된 구조, 최소한의 장식만 남긴 다다미 방에서는 권력의 과시보다는 절제와 균형이 느껴진다. 호소카와 교부테이는 일본 무사 문화가 단순한 군사력이 아니라, 삶의 태도이자 미학이었음을 보여준다.
나쓰메 소세키 유적 – 문학이 머물렀던 시간
근대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젊은 시절 쿠마모토에서 교편을 잡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가 머물렀던 흔적과 관련 유적은 화려하지 않지만, 도시의 성격을 한층 더 깊게 만든다.
무사와 성의 도시였던 쿠마모토는 소세키를 통해 사유와 문학의 도시로 확장된다. 그의 작품에 담긴 고독과 근대인의 내면, 사회에 대한 통찰은 이 도시의 공기 속에서 자라났다. 쿠마모토는 칼과 붓이 함께 존재했던 드문 도시다.
쿠마모토는 강한 도시가 아니라, 깊은 도시다
쿠마모토를 따라 걷다 보면 이 도시는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성은 웅장하지만 요란하지 않고, 정원은 아름답지만 말을 하지 않으며, 문학은 조용히 스며든다.
쿠마모토는 보여주기보다 남겨두는 도시다. 그래서 이곳의 여행은 사진보다 기억으로 남는다. 규슈 여행에서 하루쯤은 쿠마모토에 시간을 내어 천천히 걸어보길 권한다. 이 도시는 서두르는 여행자보다, 생각하는 여행자를 환영한다.
